UNDERCOVER SCAB 03SS

Editorial

UNDERCOVER SCAB 03SS

디자인 그 이상의 서사

2026년 1월 21일

단순히 옷이라 부르기엔 무겁고, 하나의 ‘현상’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던 컬렉션이 있다. 바로 언더커버의 2003 S/S ‘SCAB’.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아카이브 컬렉터들이 이 기괴한 누더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빈티지한 디자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 거친 원단 사이사이에 시대의 아픔을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가 촘촘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21세기 패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웠던, 그 전설적인 ‘치유의 기록’을 다시 펼쳐보려 한다.

출처: pinterest
출처: pinterest
우라하라의 반항아 준 타카하시, 파리에 입성하다
우라하라의 반항아 준 타카하시, 파리에 입성하다
90년대 도쿄 우라하라의 좁은 골목은 그에게 너무 작았다. ‘노웨어(NOWHERE)’를 이끌며 펑크 정신을 패션에 이식하던 준 타카하시. 그는 2001년 일본 패션계 최고의 영예인 ‘마이니치 패션 대상’을 수상하며 이미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컬트 여왕’ 레이 가와쿠보가 세계 무대 진출을 위한 조력자가 된다. 2002년, 마침내 파리에 입성한 그는 화려하고 안전한 데뷔 대신 자신만의 가장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전 세계에 ‘언더커버’라는 존재를 각인시킨다.
출처:Vogue Japan
출처:Vogue Japan
타협없는 평화, Sedition과 언더커버와의 연결고리
타협없는 평화, Sedition과 언더커버와의 연결고리
컬렉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우리는 이 전설적인 런웨이의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컬렉션을 지배하는 이 그래픽들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크러스트 펑크 밴드 ‘Sedition’의 1993년 앨범 <Earthbeat>. 준 타카하시는 앨범 커버를 의류 패턴으로 과감하게 차용했는데, 이는 단순한 디자인적 오마주가 아니었다.
Sedition 'Earthbeat' (1993)
Sedition 'Earthbeat' (1993)
귀를 찢는 하드코어 사운드 속에 “타협 없는 평화” (Peace Not Compromise)와 “자연 회귀”를 노래했던 밴드의 정신을 옷에 그대로 이식한 것이다. 가장 시끄러운 소음(Noise)으로 역설적인 평화를 갈망했던 그들의 외침은 당시 언더커버가 세상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의 핵심과 맞닿아 있었다.
Undercover SS03 SCAB 'Peace Not Compromise' Cargo Pants
Undercover SS03 SCAB 'Peace Not Compromise' Cargo Pants
출처:archiv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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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상흔을 봉합하는 토속적 의식
9.11의 상흔을 봉합하는 토속적 의식
2002년의 세계는 9.11 테러의 충격과 다가오는 이라크 전쟁의 전운으로 깊은 트라우마에 잠겨 있었다. 준 타카하시는 Sedition의 반전(反戰) 메시지를 빌려 아픔의 시대를 위로하는 일종의 ‘토속적 의식’을 치렀다. 상처가 아물기 전 생기는 딱지(SCAB)처럼, 그는 수천 번의 거친 바느질로 옷을 기워내며 시대의 아픔을 물리적으로 봉합하려 했다. 그것은 공포에 잠식된 세상을 향해 패션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저항이자 상처 입은 인류를 위한 기도였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기괴한 희망으로 기워내다 출처:archivePDF
아물지 않은 상처를 기괴한 희망으로 기워내다 출처:archivePDF
기괴한 누더기로 시작해 형형색색의 부르카로 끝을 맺은 피날레. 그것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을 아름다움으로 덮어버린 ‘치유와 희망의 레퀴엠’이었다. SCAB 시즌이 단순히 옷을 넘어 위대한 유산으로 남은 이유는 디자이너가 패션을 도구 삼아 동시대의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희망을 기워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했던 준 타카하시. 그가 거친 바느질로 남긴 이 숭고한 서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출처:akaibu.co
출처:akaibu.co